[미디어한국]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경찰에 전격적으로 체포되었다. 공직선거법과 국가공무원법 위반 혐의라 한다. 경찰은 여러 차례의 소환 요구에 불응했기 때문이라 설명하고, 이진숙은 공적 일정으로 응하지 못했을 뿐이라 항변한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그 태생이 정치인일 수밖에 없는 정무직 방통위원장 이진숙의 말들이, 공무원법 위반이고 선거법 위반이라면, 즉 이렇게 작전하듯 전격적으로 체포할 범죄라면, 현직 검사로 절대적 정치 중립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검사 임은정은 어떠한가? 역대 검사들 가운데 가장 노골적인 정치 검사가 임은정 말고 누가 있는지, 이진숙의 체포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검사 임은정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건, 정무직은 정치적 발언이 대체로 용인되지만, 국가 공무원이며 그 신분을 헌법이 보장하는 검사는 반드시 정치와 권력으로부터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기를 바란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권력이고 법이다.

국민은 그 사이에서 묻는다. 과연 이 체포가 법의 필요였는가? 아니면 정치의 필요였는가? 라고….

법은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이 아니다. 법은 집행되는 방식에서 비로소 신뢰를 얻고 신성함이 있다. 권력자에게는 무한한 관용을 베풀고, 힘없는 이에게는 단칼에 옭아매는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 숱하게 보아온 장면이다.

법은 형식상 평등하다 하나, 그 그림자는 언제나 권력의 무게에 따라 기울어져 왔다. 이번 사건 또한 그 의혹을 지우기 어렵다. 역시나 법과 체포한 경찰과 이에 동의해 준 검사와 판사 모두는 전형적인 권력의 도구이며 하수인들이었다.

정치가 개입된 순간, 사건은 법정의 자리를 벗어난다. 선거법 위반이라는 혐의는 곧 정치의 심장부와 맞닿아 있다. 그 때문에 체포라는 행위는 법 집행을 넘어 곧바로 정치적 메시지가 된다. 여야가 즉각적으로 공방을 벌인 이유도 거기에 있다.

여당은 야당의 치부를 드러내려 하고, 야당은 정권의 보복을 주장한다. 국민은 피곤하다. 그들의 눈에는 진실보다 계산이 먼저 비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상징성은 더욱 깊고 심각하다. 이진숙은 한때 남자도 하기 어려운 종군기자였다. 총탄이 빗발치는 현장에서 진실을 전하던 이가, 권력의 중심에 들어서더니, 이제는 체포되어 피의자로 법정에 서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부당한 체포!  이진숙 전 방통위원장 
부당한 체포!  이진숙 전 방통위원장 

기자의 펜이 권력의 칼이 되고, 그 칼날이 다시 기자 출신의 몸을 베는 아이러니. 이는 단지 한 개인의 추락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에서 언론과 권력이 어떻게 뒤섞이고, 서로를 이용하며, 마침내 공멸의 길을 걷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좋든 싫든 언론은 권력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이게 세계 언론의 상식이며 정의다. 그러나 한국의 언론은 오래전부터 권력의 울타리 안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갔다. 그 결과 언론은 비판의 기능을 잃고, 권력은 견제의 눈을 잃었고, 나라와 국민은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기자가 권력자가 되고, 권력자가 다시 언론의 얼굴을 빌리는 구조 속에서, 결국 국민은 올바른 정보와 공정한 심판자를 잃어버렸다. 이번 사건이 국민에게 낯설지 않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우리는 물어야 한다. 법은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느냐고? 언론은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느냐고? 

법이 권력의 도구로 전락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법이 아니다. 언론이 권력의 방패가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언론이 아니다.

이번 이진숙 체포는 단순한 개인의 사법 문제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풀지 못한 뿌리 깊은 물음, 즉 권력과 법, 언론의 제자리에 관한 물음을 다시 던지면서, 불의한 정권을 근본에서 흔들며 언론의 역할을 새롭게 세우는 시작이 될 것이다.

지금 이진숙의 체포 앞에서 침묵한다면, 우리는 내일 또 다른 누군가의 체포 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도 같은 의문을 반복할 것이다. "이것은 법의 필요인가, 정치의 필요인가?"

개인적으로 이진숙(이진숙(李眞淑, 1961년 7월 4일생~ )의 뜻을 풀어보면, 단순한 이름이 아니다.

“李眞淑”이란 이름은 늘 예측 불가능한 혼탁한 세상 속에서 본래의 참됨을 잃지 않고, 맑은 물처럼 세상을 씻어내는 존재라 하겠다.

**이진숙(李眞淑)**

李 — 오얏나무 뿌리 깊이 내린 그 성(姓),

眞 — 거짓을 벗은 하늘의 빛,

淑 — 맑은 물처럼 세상의 혼탁을 씻어내는 덕이다.

일찍부터 이름은 곧 길이 되어(언론사 기자, 종군기자, 방통위원장,) 

사람의 발걸음을 이끌었고,

맑은 바람이 되어 세상의 먼지를 털어냈다.

李眞淑, 그대는

진흙 펄에 서서도 진흙에 물들지 않고,

세상에 있어도 세상에 휘둘리지 않았다.

참됨이 뿌리요,

맑음이 열매라.

오늘 그대에게 불의한 권력이 채운 차가운 수갑은

부정한 권력이 법을 어떻게 쓰는가를 잘 보여준다.

묶인 건 두 손이고 갇힌 건 몸이지

마음이 아니다.

眞淑 한결같은 그 마음

세상의 빛이고 국민의 희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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