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설명: 봉성산 허허당 뜰에 핀 국화가 아름답다.
사진 설명: 봉성산 허허당 뜰에 핀 국화가 아름답다.

[미디어한국] 며칠이었는지,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

인생 마지막 버킷리스트 가운데

가장 핵심이라 여기는 원고를 정리하다가

어느 순간 헤아릴 수 없는 늪에 빠져버렸다.

그 늪은 물기가 흐물흐물한 진흙 펄이 아니다.

어디가 바닥인지, 어디가 출구인지도 구분되지 않는

머리와 마음의 깊은 흡입구 같은 것이었다.

걸음을 옮기는 순간마다 더 깊이 빨려 들어가고,

빠져나올수록

더 깊은 어둠이 펼쳐지는 이상한 공간이었다.

그 늪에서 허우적대는 동안

나는 사실상 책상 앞에서만 살았다.

배고프면 대충 먹고,

졸리면 그대로 엎드려 잤다.

시간 감각도 사라졌고

날마다 하던 샤워조차 하지 않았다.

아침이면 세수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그저 글의 한 구절, 한 문장, 한 개념을 붙들고

끝 모를 미로 속을 배회했다.

그렇게 계속 가다 보면

언젠가는 빠져나올 줄 알았다.

그게 진리의 길이고, 깨달음의 길이며,

내가 평생 살아온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늙어서 맞닥뜨린 그 늪은

젊은 시절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박혜범 본지 논설위원
박혜범 본지 논설위원

그리고 오늘 오전, 나는 마침내 늪을 건넜다.

늪 가에 앉아 잠시 안도하는 순간,

물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내가 놀랐다.

내가 보아도

저게 과연 사람인가 싶은 몰골이었다.

얼굴은 무너져 있었고,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

나 스스로 놀라

부랴부랴 샤워하고

수염도 깎았다.

그리고 오거리 청자다방에 가서

커피 한 잔을 사 들고 와 창가에 앉았다.

그동안 나를 짓누르던 찌든 땀 냄새 대신

갓 내린 커피 향이 공간을 채우고,

창밖 뜰에 핀 국화꽃이 보였다.

그 국화꽃을 보는 순간

비로소 내가 다시 사람 사는 세상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잠시,

“지랄 ― 너도 참 지랄이다.”

내가 나에게 한 소리다.

이건 단순한 버릇이 아니라 병이다.

내 사는 일이 병이다.

무엇인가에 몰입하면

시간과 공간을 잊어버리는

나의 오래된 병이다.

젊을 때는 체력이라는 방패가 있었다.

밤을 새워도, 이틀을 굶어도 몸이 버텨주었다.

그러나 나이는 그 방패를 하나둘 벗겨내고

이제는 작은 늪에도 전신이 잠겨버린다.

그 속에서 나는 매번 허우적거린다.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고쳐야 한다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불치의 병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

이게 별것 아닌 듯 보이지만

실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내가 나를 알고

내가 사는 나를 제대로 관리하는 것 ―

이 단순한 말이

살면 살수록 가장 어렵다.

가장 힘들고,

가장 깊은 삶의 공부가 된다.

글이라는 것,

지리산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산다는 것,

지금 내가 쓰는 이 원고라는 것도

결국은 늪을 건너는 일이다.

그리고 그 늪을 건너는 동안

나는 내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다시 살아나서

나는 또 깨닫는다.

내가 참 단순한 짐승이라는 것을

창밖 국화꽃 한 송이가

나를 세상을 사는 사람으로 되돌려 놓았듯이,

사람은 아주 작은 것에서 다시 살아난다.

한 줄기 바람에서,

한 모금 커피에서,

한 송이 꽃에서,

그리고

문득 나를 돌아보는 한순간에서.

사는 일은 병이지만,

그 병이 우리를 살리기도 한다.

늪을 건너며

나는 나를 다시 보았고,

그 일을 통해

또 한 번 사람으로 돌아온 늦가을 오후

창밖 뜰에 핀

붉은 국화꽃이 아름답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미디어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