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10월 4일, 미타암에서 돌아와 쓰는 글

사진 설명: 각심 큰스님의 진영(眞影)임
사진 설명: 각심 큰스님의 진영(眞影)임

[미디어한국] 오늘 음력 10월 4일,

“각심(覺心) 큰스님”의 열반일이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하루지만

마음 한편에서 오래 묻어둔 무엇인가가

서서히 자욱한 운무가 걷히듯 깨어나고 있었다.

문득,

“오늘은 꼭 와야 한다.”

맞은편 지리산에서 각심 큰스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기운—

큰스님이 미타암 숲에 살아 계신 듯하였다.

멀리 서울에서 오신 남효선생과 함께

서둘러 택시를 불러 

안개 자욱한 구례읍을 지나 지리산 미타암에 들어선 순간

다른 세계로 건너온 듯하였다.

화엄사 골짜기 어느 자리에서도 보이지 않는

법성봉의 위의(威儀)가

이곳에서만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누구라도 미타암 도량에 발을 딛는 그 순간

왜 이 봉우리가 ‘법성봉’인지,

왜 미타암이 여기에 있고

왜 혜광 큰스님이 이 도량에 주석하여 계시는지

그 자리에 서면 누구나 저절로 안다.

법신불의 숨소리가 들리고

그 품의 따뜻한 체온이 온몸으로 스며드는 자리—

미타암은 그런 도량이다.

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안에서 퍼지는 깊은 체온을 느끼게 되고

스스로의 ‘법성(法性)’이 고요히 드러나는 도량이다.

늦가을 단풍이 깊은 사색을 품은 미타암은

산이 만든 정토였다.

낭랑하게 흐르는 보민 스님의 염불은

바람이 파도에 부딪히듯 온 산의 숲에 울려 퍼졌고

그 소리에 닿는 순간

마음의 먼지까지 깨끗하게 씻기는 듯하였다.

영단 앞에 서서 

큰스님의 생전 모습을 담은 진영(眞影)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를 눈물이 났다.

그 미소, 그 눈빛—

십오 년의 시간이 그 자리에서는 

찰나처럼 사라졌다.

추모 법회를 집전하시는 혜광 큰스님은 

모든 생명을 품어내는 지리산이었다. 

말없이 앉아 계신 모습만으로도 

지리산 전체가 도량이 되고 그 음성은 산울림이 되었다.

나는 조용히 큰스님의 영전에 삼배의 절을 올렸다. 

그 엎드림은 절이 아니었다. 

지난 세월의 무게를 내려놓고 드리는 감사의 숨이었다. 

혜광 큰스님의 법문을 듣는 중에 

오래전의 인연이 되살아났다.

젊은 날,

지리산 화엄사를 관광지로 만들려는 거센 세력에 맞서

홀로 분투하던 그 절박한 시절—

말없이 나를 지켜주신 각심 큰스님의 마음 ―

그 마음이 오늘의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그 깊은 은혜를 잊을 수가 없다.

지금 다시 그때의 일을 가만히 돌이켜 보면, 

각심 큰스님과 혜광 스님, 그리고 지리산은 셋이 아니다. 

하나의 몸, 하나의 마음이다. 

깨달은 마음 각심(覺心)은 

깨달음의 산 지리산이 숨 쉬던 깊은 자비의 숨이고, 

고요한 지혜의 빛 혜광(慧光)은 

성품 그대로 가만히 관조하는 지리산 지리(智異), 

반야의 눈이다. 

그리고 지리산은 

그 두 마음을 품어 길을 내준 큰 보살이다. 

깨달은 마음과 지혜의 빛과 산이 

서로를 비추어 본래 한 법계를 이루었고, 

그 하나가 화엄의 지리산을 지켰다. 

산과 각심과 혜광, 각각 삼승(三乘)의 세 이름이 

하나의 뜻으로 

한 몸 불승(佛乘)의 지리산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세파에 늙고 병고에 찌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러나 단 하나,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하는 일만큼은

할 수 있다.

오늘 미타암 추모 법회에서 돌아와

이 글을 쓰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40여 년 전

지리산과 화엄사를 위해 아무도 모르게 힘을 보태 주신

각심 큰스님께 바치는 작은 마음의 예경이다.

단언컨대 그때 각심 큰스님과 

그리고 그 제자인 오늘의 미타암 혜광 큰스님이 없었다면,

지금의 화엄사는 결코 이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각심 큰스님의 공덕은 지리산이 알고,

그 깊은 은혜는 내가 안다.

큰스님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지금도 15년 전 그 마지막 가을 저녁의 냄새와

지리산 위에 걸리던 구름 빛을 잊지 못한다.

그날의 마음을 오래도록 품고 살아온

한 줄의 기록이 있다.

오늘 이 글을 마치며

그 기록을 다시 큰스님의 영전에 바친다.

〈각심 큰스님 영전에 바치는 마음〉

조금 전 해 질 무렵

슬프고 애통한 비보를 들었다.

오늘 경인년 11월 12일,

지리산에서 평생 고결히 수행하신

각심 큰스님께서

육신을 한 줌의 바람으로 놓아버리고

영원의 길로 떠나가셨단다.

(11월 9일 음력 10월 4일 열반)

오래전 지리산을 지키기 위해

홀로 분투하던 나를 말없이 지켜주시던 

고향집 큰 누님 같은 분이었는데….

이 가을,

지리산 구름으로 떠나가셨다 하니….

어찌 할 거나.

어찌 할 거나.

세파에 시달리고

십 년 병고에 찌든 몸이

저녁 빛 어린 

지리산을 바라보니

애통하여라.

식은 눈물조차 말라버렸네.

2010년 11월 12일 혜범 합장

지리산의 바람이 오늘 내가 남긴 이 글을

조용히 큰스님의 품으로 데려가기를 바란다.

미타암을 품은 법성봉 위로 저녁 빛이 스치는 순간,

나는 이 마음을 다시 각심 큰스님의 영전에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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