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포커스] 도덕적 불감증...유동적 세계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너무나도 소중한 감수성에 관하여
[책포커스] 도덕적 불감증...유동적 세계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너무나도 소중한 감수성에 관하여
  • 황문권 기자
  • 승인 2016.05.01 23: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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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한국///황문권기자]  “악은 평범한 이웃의 모습을 하고 있다.”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 사이에서 ‘악’은 쉽게 생겨나지 못할 것 같지만, 유동적 세계에서 악은 꼭 전쟁이나 극단적인 압박 속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악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심할 때, 타인을 이해하지 못할 때, 타인에 대한 이해를 거부할 때와 같이 일상적이고 빈번하게 나타난다. 게다가 오늘날의 인간관계가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의 태도를 닮아가면서 그 속도는 급박해지고 정체는 더욱 교묘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유럽 사상의 최고봉’이라고 불리는 지그문트 바우만과 ‘유랑하는 학자’ 레오디나스 돈스키스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독특한 종류의 도덕적 불감증을 분석하기 위해 ‘아디아포라’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아디아포라는 인간의 특정 행위나 범주를 도덕적 의무와 평가의 영역 밖에 놓는 것으로, 일종의 도덕적 마비 상태를 함축한다. 둘은 이 개념이 의미하는 바처럼 우리 안에서 자라나는 폭력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회복하기 위한 성찰과 모색을 꾀한다.

기술은 당신이 방관자로 있는 것을 허용치 않을 것이다. “나는 할 수 있다.”는 “나는 해야만 한다.”로 변질된다. 나는 할 수 있다. 고로 나는 해야만 한다. 딜레마는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딜레마들의 세계가 아니라 가능성들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이것은 어떤 도덕도 남아 있지 않은 위키리크스의 윤리와 유사한 면이 있다. 염탐하고 누설하는 것은 의무이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 무슨 목적을 위해 그런지는 불분명하다. 이것은 그저 기술적으로 실행 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행해져야만 하는 어떤 것이다. 정치를 추월한 기술로 인해 생겨난 도덕적 공백이 여기에 존재한다. 이런 의식의 문제는 권력의 형태나 정당성이 아니라 권력의 양이다. 무심결에 은밀하게 숭배되는 악은 더 많은 재정적 또는 정치적 권력이 있는 곳에 존재한다. 악은 서구 사회에 숨어 있다.

악에게는 여전히 이름과 그것이 머무는 지역이 있지만,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악이 약하고 무력해서 자신의 흔적을 가린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한편으로 인간의 고통에 대한 무감각과 다른 한편으로 개인의 비밀을, 즉 이야기하거나 공표하지 말아야 할 것을 없앰으로써 사생활을 식민지화하려는 욕망은 새로운 악의 두 가지 표현 형태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일대기, 내밀한 이야기, 삶과 경험 등이 전 세계적으로 이용되는 것은 무감각과 무의미의 한 증상이다. _18~19쪽

레세크 콜라코프스키가 적절히 관찰한 것처럼 진부한 상투어와 고정관념은 인간의 후진성과 어리석음을 증언하기보다 끊임없는 의심 속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준다. _20쪽

악은 전쟁이나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오늘날 악은 누군가의 고통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할 때, 타인에 대한 이해를 거부할 때, 말없는 윤리적 시선을 외면하는 눈길과 무감각 속에서 더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_23쪽

인간의 사생활과 마찬가지로 역사를 연구하고 비판적으로 물을 수 있는 우리의 권리는 자유의 한 초석이다. 이런 의미에서 루뱅 가톨릭대학의 역사학 교수 미셸 뒤물랭이 역사가와 재판관의 역할과 기능을 모두 떠맡으려는 정치가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 것은 전적으로 옳다. “역사가들이 그들의 일을 하도록 놔두어라. _58~59쪽

너무 많은 기억은 우리의 유머 감각뿐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도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포기할 수 없다. _59쪽

폭력을 매일 보면 그것은 더 이상 경악이나 혐오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폭력이, 말하자면 우리에게서 자라난다. _73쪽

종종 우리는 서로 연결된, 게다가 서로의 조건이 되는 두 가지를 함께 보지 못하곤 한다. 즉 한편으로는 언어적으로나 회화적으로 묘사된 폭력과 잔혹 행위들이 대중매체에서 넘쳐나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 논평들이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을 비하할 목적으로 명백히 가학적이거나 피학적인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쓰러뜨리는 잔인한 유형의 담론은, 다시 말해 자기부정과 자기파괴의 완만한 과정으로서 전개되는 사회정치적 논평은 실제로 비판적 태도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왜냐하면 참되고 훌륭한 비판은 대안을 제시하는 것, 어떤 사상을 펼치려고 시도하는 것, 어떤 논리에 입각하거나 다른 방식의 인식이나 사고에 입각해 행동하는 것 등이기 때문이다. 언어적이고 정신적인 동족상잔 또는 도덕적인 상호 말살은 오직 한 가지를 의미한다. 즉 이것은 자유로운 토론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것을 거부하고 질식시키는 행위이다. 가학적인 언어는 보통 상대를 통제하고 괴롭힘으로써 상대를 예속시키려는 목표를 추구하는 반면에, 피학적인 언어는 자신이나 자기 나라의 실제 적들도 내뱉지 않을 만큼 심한 말들을 자신에게 내뱉는다는 특징을 지닌다. _73~74쪽

가장 인기 있는, 가장 널리 메아리치는, 그러나 실제 메아리처럼 지극히 짧은 순간 동안만 울려 퍼지는 소통형태들은 140개 이상의 문자를 허용하지 않는다. 현재 시장에 나와 있는 상품들 가운데 가장 희소한 상품인 인간 주의력의 범위는 메시지를 작성해서 보내고 받기에 적당한 크기와 지속 기간으로 단축되었다. 황급한 삶과 순간의 폭정의 첫 번째 피해자는 언어이다. 언어는 야위고 빈곤해졌으며 저속해졌고 그것이 전달한다고 추정되는 의미들의 착취에 시달리고 있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의미 있는 단어들과 그것들의 의미를 찾아 유랑하는 기사들은 이것에 수반하는 부상자들이다. _85쪽

우리는 오랫동안 선택이 자유를 정의한다고 믿었다. 서둘러 덧붙이자면 특히 오늘날에는 인간 존재의 불가해성과 인간 사생활의 불가침성이라는 견해를 옹호하는 것이 자유를 정의한다. _139쪽

●출판사 서평을 보자.

역사상 가장 가깝고 넓은 아고라의 시대, 그러나 가장 가난한 인간적 감수성
‘현재 유럽 사상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지그문트 바우만과 ‘유랑하는 학자’ 레오니다스 돈스키스의 인간다운 삶의 조건을 회복하기 위한 전방위적 성찰과 모색. 우리 안의 평범한 악과, 반성할 줄 모르며, TV쇼와 기업을 고스란히 닮아버린 정치, 불안에서 탈출하기 위해 자유를 포기한 세상, ‘네트워크’라는 가상의 연대에 매스를 들이민다.

불안에서 탈출하기 위해 자유를 포기한 세상
유동적 세계에서 악은 전쟁이나 사람들이 극단적인 압박 속에서 행동해야만 하는 상황에 한정되지 않는다. 오늘날 악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일상적으로 무감각할 때, 타인을 이해하지 못할 때, 타인에 대한 이해를 거부할 때, 우리의 윤리적 시선을 무심코 거둘 때와 같이 일상적으로 나타난다. 한편 악은 국가와 이데올로기마저 민영화된 형태로 나타나고, 인간관계도 상품을 소비하는 소비자의 태도를 닮아가면서, 그 속도는 더 급박해지고 정체는 더 교묘해지고 있다.

아디아포라 - 악은 독재자가 아니라 익명의 가면을 쓰고 있다
바우만과 돈스키스는 우리 사회에 독특한 종류의 도덕적 불감증을 분석하기 위해 ‘아디아포라(adiaphora)’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아디아포라는 인간의 특정 행위나 범주를 도덕적 의무와 평가의 영역 밖에 놓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즉 일종의 도덕적 마비 상태를 함축한다. “폭력을 매일 보면 그것은 더 이상 경악이나 혐오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폭력이, 말하자면 우리에게서 자라난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알려고 하는 것은 인간적 공감을 파괴한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알려고 하는 것은 인간적 공감을 파괴한다. 선정적이고 무가치한 정보들로 가득 찬 사회에서 주목을 받는 사람들은 오직 유명 인사들과 미디어 스타들뿐이다. [도덕적 불감증]은 바로 이것이 우리의 활동, 언어, 생각 없이 그저 안전하게 모방하면서 말하거나 행한 모든 것이며, 모두 우리가 성찰하지 않은, 그러나 잠자코 동의한 악들이라며, 윤리적 거울의 원리를 담아 우리의 현실을 가차 없이 비춘다. 

  추측컨대 ‘좋은 사회’에 대한 비전들이 더 이상 유행하지 않게 된 까닭은 결국 그런 비전들을 실현할 수 있는 권력이 더 이상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그것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할 수 없다면, 굳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골머리를 썩일 필요가 없지 않은가? 우리는 현재 많은 위기를 거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것은, 아니 다른 모든 위기들을 거의 해결 불가능하게 만드는 ‘고차 위기’는 행위주체의 위기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은 우리가 과거 세대들로부터 물려받았고 평소 알고 있던 행위주체의, 즉 그것을 만든 과거 세대들에 의해 믿을 수 있는 것으로 증명되었고 그들이 우리에게도 사용을 권장하고 기대했던 국가라는 현존 행위주체의 위기이다. _154~155쪽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인권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는 우리 시대의 도덕적 타협은 서구에서조차 매우 기만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파는 흔히 좌파가 여성 동성애자, 남성 동성애자, 양성애자, 성전환자 등의 권리를 암시할 때마다 짜증난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좌파는 흔히 우파가 세계 각지의 기독교인들이 겪는 박해를 언급하거나 단순히 기독교를 유럽 배후의 원동력, 적어도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감수성의 한 형태로서 언급할 때마다 거부감을 감추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인간의 신체, 사생활, 기억 등의 문제에 몰두 내지 집착할 때, 그들은 좋은 정책 대신에 도덕적 다수파를 추구하면서 도덕적이고 교육적인 관심으로 위장된 새로운 형태의 사회적 통제를 밀어붙이는 경향이 있다. _163쪽

죽음의 불가피성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우리에게 문화가 있게 된 첫 번째 이유이다. 이것은 문화의, 모든 문화의 제1원천이자 동력이다. 실로 문화는 죽을 운명의 삶을 살 만하게 만들기 위한 지속적이고 영원히 불완전하며 원칙적으로 완료될 수 없는 노력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는 자각이야말로, 그리고 그래서 생기는 죽음에 대한 영원한 공포야말로 세계-내-존재라는 우리의 존재양식과 우리 자신을 인간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도 있겠다. _181쪽

사람들은 하느님밖에 모르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홀로코스트, 집단 학살, 인류에 대한 범죄,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 같은 끔찍한 인간적 경험들을 가리키는 주요 용어를 점점 더 마음대로, 점점 더 무책임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런 용어들은 현대적 디자인의 인테리어에 맞게 조정된 고가구와도 같다. 한때 삶과 문화의 활력 넘치는 형태였던 것이 생명을 잃은 장식으로 변모한다. 이 경우에는 타인의 고통과 인간성의 말살이 기껏해야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만의 이야기 방식에 (또는 자신만의 ‘진리’에) 주의를 돌리기 위한 방법이 되고 있다. _194쪽

담론의 한 양태로서, 역사적 서술 안에서 의미의 한 틀로서 작용하는 피해자 신분은 타인에 대한 공감적 이해, 인간적인 동정심, 소속감 등으로 반드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피해자 신분은 권력 구조를 대변하는 자들에 의해 자신이 선정되었다는 느낌을 강화한다. 만약 그렇다면 세계는 피해자들에게 무언가를 빚진 셈이며, 이 무언가는 권력에 접근하는 통행증이 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성공적인 피해자 신분은 머지않아 권력을 나눠 갖자는, 세계적 주목의 케이크를 분할하자는, 이미 확립된 정치적 어휘들과 현실 정치에 대한 접근을 허용하라는 요구인 셈이다. _218~219쪽

우리를 (이데올로기적으로 확립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보존하는 기억은 우리 바깥에서 유래한다. 기억은 여기가 아니라 다른 어딘가에 살고 있다. 그리고 고의적인 망각은 환상이 아니라 사실이다. 여러 면에서 우리는 회상의 공동체가 아니라 조직되고 체계적이며 고의적인 망각의 공동체이다. 두 번의 세계 대전과 온갖 사회적 재난과 정체성을 말살하고 기억을 억압하는 온갖 정신적 상처를 낳은 전체주의적 근대성 이후에 우리의 의미감은 새롭게 태어나 (우리를 완벽한 피해자나 새로운 정치적 화젯거리로서 확립하는 대신에) 우리의 현재와 과거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의 기억은 자기비판적인 자기와 개방적인 정체성을 잇는 연결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기념비를 세우는 상상력의 비극적 유희와도 같다. _223~224쪽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인생의 몇몇 단계에서 주위 환경의 인정을 받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권력과 영향력을 위한 국지적 음모와 전투의 일상을 벗어나 매우 빈번히 유랑의 길을 떠나는 학자들은 그들의 현재 지위가 이전 처지와 어느 정도 비슷해지면, 즉 어떤 면에서는 똑같은 규칙과 기준이 적용되는 듯하지만 진짜 국외자들을 수용하기에는 자원과 용기가 부족한 환경에 처하게 되면 자신의 이전 환경으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이럴 때 우리는 길 잃은 세계에, 자신의 행로를 잃어버린 세계에 처하게 된다. 이 끊임없는 변화의 현실 속에서 믿을 만한 기준은 남아 있지 않고 ‘우리의’ 체제에 의해 주조되지 않은 사람과 다른 곳에서 배양된 사람은 종신 교수들의 클럽에 가입할 자격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팀을 위해 일하는 자가 되는 것뿐이다. 즉 자신 안에 있는 모든 비판적인 반대의 목소리를 죽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노동윤리나 직업윤리의 모습을 한 집단적이고 익명적인 결정들의 타당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모든 유혹을 물리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되는 것뿐이다. _279쪽

정치적이고 역사적으로 그럴듯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오늘날 생존력 있는 정치를 펼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설득력 있는 줄거리, 감동적인 비전 같은 훌륭한 이야기 없이는 정치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것은 훌륭한 문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의 학문 활동에 절차상 하자가 있거나 절차가 우리를 저버릴 때, 우리는 이야기로 주의를 돌린다. 이것은 움베르토 에코와도 상당히 부합하는 태도이다. 학술적인 언어가 우리를 저버릴 때, 우리 주위의 세계에 대한 해석이 처한 곤경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방법으로 소설이 등장한다. _280쪽

우리는 언제나 자연으로서의 세계와 역사로서의 세계를 마주하고 있다. 자연으로서의 세계는 인과율의 지배를 받고 역사로서의 세계는 맹목적이고 설명 불가능한 운명의 지배를 받는다. 문화에는 원인이라는 것이 없다. 꽃이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지만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문화는 스스로 발전하고 전개된다. 문화는 자신에 대해 성찰하지도 않고 자신을 설명하지도 않는다. 문화는 그저 믿음, 의미 있는 것에 대한 자연스런 느낌, 존재하고자 하는 바람에 의해 지탱될 뿐이다. 반면에 문명은 존재하길 원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문명은 자신과 세계 전체를 완벽하게 설명한다. 따라서 문명은 죽음, 공허하고 영혼이 없는 지성, 이 세계에 존재함이 의미 있다는 느낌이 제거된 자기해석의 본거지이다. _301쪽

점점 더 뚜렷해지고 근거도 충분한 대중적인 인상과 점점 더 늘어나는 전문가들의 의견에 따르면 선거를 통해 선출된 의회와 의회가 지도, 감시, 감독할 헌법상의 의무가 있는 정부는 그들의 일을 할 능력이 없다. 마찬가지로 제도권 정당들도 더 이상 그들의 일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 그들의 지도자들이 장관직을 맡는 순간, 그래서 증권거래소와 시장의 힘의 압도적이고 감히 손댈 수 없는 평범함에 직면하는 순간, 그것이 표면상 ‘주권’이 있는 민족국가들의 기관들과 기구들에게 부여·용인된 권위의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들은 선거 때 내세웠던 낭만적인 공약들에서 후퇴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래서 깊고 또 점점 더 깊어지는 신뢰의 위기가 생긴다. 민족국가 제도들의 능력에 대한 신뢰의 시대는 자신감의 제도적 결여와 정부의 행위 능력에 대한 대중적 불신의 시대에 길을 내주고 있다. _318쪽

행복은 빠르고 효과적이며 인식되지 않는 데, 가장 중요하게는 쓸데없이 깊은 약속의 짐을 지지 않는 데 있다. _359쪽

우리 시대에 배반은 상황적 인간, 즉 자신의 인간적 본질에서 분리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다른 사람에 의해 고립된 실용주의자이자 도구주의자의 기회, 재산, 상투 수단이 되었다. _3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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